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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생각과 생각

위기의 시대

지금은 21세기 초이다. 이미 세기말은 지나갔지만 세기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아직도 짙게 배어있다. 인간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대립과 반목은 날로 격화되고 발전한 기술만큼 사회의 발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아이들이 스스로 거대한 흉기를 갖고 한데 모여있는 상황과 같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개개인으로 보아도 탈가치가 무가치로 치닫으면서 지켜져야 할 것에 대한 공감이 형성되지 않은채 '막나가는' 경우가 잦다. 포스트 모던은 모던에 대해서는 포스트했지만 현대에 대해서 어느것 하나 제시하지 못했다. 현대는 아직도 근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탈근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개인은 기술의 발전을 조금도 따라오지 못했다. 양적으로 증대된 '대중'은 기술의 발전에 비해 전혀 진보를 이루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과도하게 빠른 기술의 발전이 있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로 19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가능한 것'의 영역은 확대되어 왔다. 특히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혁명은 '비인간적인 위력'을 지닌 병기마저 가능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총력전으로 대표되는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인간이 전쟁에 대한 큰 두려움과 신경질적인 태도를 가질 법한 시대에 저러한 혁신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핵무기라는 절대적인 무기의 등장으로 전쟁, 그 중에서도 총력전에 대한 지구적인 자제가 요청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제를 벗어나는 위협과 이익을 둘러싼 충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세계화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된다는 긍정적으로 보이는 허상 아래 과거 존재했던 문제들이 인구 수 증가로 더 커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국가 간 대립과 갈등에 대해서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 추구할 수 이익이 많아지고, 국가 간 대립과 갈등이 촉발되면서 어느때보다 분쟁의 씨앗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인류는 어느 정도의 해법은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바로 2차세계대전 이후 설립한 국제연합(UN)과 패권국가로 기능하는 미국이 그것이다. 미국은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방백처럼, 국제연합은 백들의 회의처럼 존재하면서 세력의 균형이 가능하게 하였다. 지역 간 문제를 국가가 조정하듯, 국가간 문제를 국가 외의 형태를 통해서 조정하려는 것이다. NGO라든가 하는 거버넌스가 이 영역을 수행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지역이 국가에 통합되는데 걸린 시간에 비해, 국가가 국가연합에 영향을 받고 작용을 한 시간은 지나치게 짧으며 그 스케일 역시 지나치게 거대하다. 물론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통치와 조정은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영역으로 쉽게 해결된다고 볼 수 없다. 때문에 현재는 국가 위의 통합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국가 간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주력하고 있는듯하나, 이렇게 되면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대처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때문에 전쟁의 위기는 여전히 상존하며, 그 전쟁의 위험성은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기술에 의해 거대화되고 있다.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인간의 성숙만이 필요하다.(혹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거나 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당연히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인간의 논의에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 상태의 인간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같은 상태를 방지하는 과정에서(물론 순서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이해와 분쟁의 조정을 시도하면서 정치가 탄생했다. 정치는 인간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조정하려는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립과 충돌은 존재하였으며, 오히려 그것을 거대화, 조직화하는데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질서의 조직과 그로부터 가능한 과학기술의 발전, 인문학적인 진보로 인해 얻어진 개선이 대립과 충돌의 거대화와 조직화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무기를 원천 방어하는 도구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이제는 개선이 피해를 능가할 수 없는 사태에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정치라는 영역 이전에 개인의 성숙을 유도하고, 그로 인한 정치의 성숙을 기대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개인의 성숙은 대중이라는, 군중이라는 거대무리에 의해서 단순 지식적인 향상 이외에는 이룩하지 못 한듯 하다. 오히려 몸을 제약하는 것들이 없어지고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증가하자 인간들이 모인 권태는 '이상한 것의 추구'로 귀결되었고 심지어 '네크로필리아'(죽음에 대한 애정)같은 극단적인 형대로 치닫기 까지 한다. '가능한 것'의 영역의 증대가 오히려 '권태'를 낳는 사태가 벌어진다. 지금 인간은 누구나 머리에 하나씩 왕관을 쓰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권태를 갈등으로 바꾸어놓는 것이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있는자-없는자의 격차이다. 재미있는 것은, 누구나 생존 이상의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기술로써 보장받은 현대에 오히려 경쟁이 심해지는 것이다. 바로 격차문제 때문에, 그리고 생산성과 능률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인간에게 양적 팽창을 강요하고 풍요로움 속에서 빈곤이 발생하고, 인간은 목표점을 지나서 폭주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제어되지 않는 본능인 욕망이 목표점을 끊임없이 후퇴시키고, 마침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향해서 인간의 폭주는 멈추지 못한다.

그리고 그 폭주는 인간의 폭주가 아니라 집단의 폭주이기도 하다. 거대한 집단 내에서 인간은 집단의 부품으로서 충실하게 행동하고, 그 대가로 여가와 소비를 누린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집단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최대한 제공하면서 이득을 최대한 취하는 형태가 되면서 집단과 그 구성원은 이질적으로 변해간다. 이것은 경제영역에서 '이윤극대화'라는 이념이 지배원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경제영역에서 지나치게 힘을 소진한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정치영역에서 쓸 힘을 잃고 만다.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서 눈사태만큼 불어난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해결할 의지를 잃고 자신들의 정치의사를 정당이나 인물이라는 표상적인 이미지에 소비하는 것도 힘겨워한다. 과거의 직접민주주의가 기술적인 난점에 의해서 달성되지 못했다면 현대에는 정신적인 난점에 의해서 달성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정치의 무관심화는 상대적으로 정치영역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이들에 의해서 이용 당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정치영역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이들은 경제영역에서 자유로운 있는 자가 되면서 결국 있는자와 없는자의 갈등은 무제한적 자유주의에서 발현되었던 19세기 초과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면서 구속되고, 무관심해지면서 촉발된 있는자와 없는자의 갈등은 자유를 평등으로 제한을 걸으면서 시작된 100여년간의 냉전과는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이 지배 체제는 과거의 그것보다도 더 강력하게 생각된다. 없는 자가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배 체제는 동시에 과거의 그것보다도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 자들에 의해 극단적인 사태는 촉발되지 않지만, 이제 그 문제가 내부로 확대생산되기 때문이다. 권태와 불만이 존재하는데, 개인적인 도착이라든가 돌발행동으로 치닫는다. 이데올로기의 전쟁에서 염증을 느끼고 정형화, 교조화에서 벗어나려는 탈근대의식인 포스트 모더니즘이 대중에게 사상의 끝인양 전도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서로 이해하자는 상대주의는 무기준으로 오해되었고, 중요한 것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추구할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전흔을 건드리는 것인마냥 여겨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정작 '여유있는 자'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추구를 꾀하고 있는 현실은 굉장히 새롭다. 그러나 이는 계층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여유있는 자들'의 사상적인 경도때문으로 여겨진다. 여하튼 개인은 무기력함에서 도출되는 무관심에서 다시금 권태를 도출하고, 특정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외면하게 됨으로써 사물이나 좋아할 만한 인물을 좋아하는 특정물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그 권태를 해소하거나, 폭력적인 사태로 치닫거나, 개인으로서 스스로 문을 잠그게 된다. 앞서 말한 개인의 성숙을 위한 담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가치에 대한 토론과 서로에 대한 이해와 함께 참여와 스스로 속한 집단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하는데 개인은 무기력만을 느낄 뿐이다.

어쩌면 정말 무기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후쿠야마가 말했듯 '역사는 종언에 도달했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기력하지 않다면 가능성은 남아있다. 전쟁의 위기와 무한경쟁의 굴레가 사람들을 가치로부터 도피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개인을 비정상적으로 만드는데에서 위기는 비롯되고 재생산되고 커진다. 그렇다면 이 사태에 대한 미약한 해결방향 제시는 당연히 가치로부터 인간이 고개를 돌리지 않게 하고 무기력하지 않음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한궤도에 놓인 스스로에 대한 주체성의 인식과 발전된 의식을 통한 전쟁의 억제가 가능해야 인간의 역사는 종언에 달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의 논의를 함에 있어서 극상의 가치는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한 존엄의 인정과 존중이 가치로 인식되어야할 필요가 존재한 것이다.

가치의 제시는 '인간'으로 할 지라도 무기력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거대 집단의 부품으로 그저 끌려갈 뿐이다. 때문에 무기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데 이것 역시 현재는 인간가치의 재발견과 그것에 대한 믿음으로 진전되길 기대하는수밖에 없다. 만일 현대의 거대집단을 통해서 생산하는 것이 역시 효과적이라면, 인간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창조성을 발현하여 가치(인간의 생산적인 측면에서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다면 역시 역사는 뒤바뀌지 않고 지금의 굴레인 위기의 시대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가치를 통해서 어떻게 상의하고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과거의 위대한 유산인 민주주의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는 인간중심일 수밖에 없는 체제이다. 인간 모두가 주인인 체제에서 모두가 왕이며 모두의 가치를 존중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로 귀결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통해서 인간이라는 가치에 대한 토론과 그것을 현안에 어떻게 적용하여 대안을 창출해내는가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지고 실행되어져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던 그리스의 '폴리스'를 '그리스인의 학교'라고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천은 단순히 지배 체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에 대한 진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면에서 권위주의라든가 학연/지연 주의는 현실적으로 극복되기 위해 노력되어야 할 '장애물'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전이 일부 국가에 대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집단에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위기는 종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다시한번 종언에 대한 위기를 겪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에 대해서는 거대한 전환과 함께 미래를 제시하는 자들에 의한 설득과 호소가 이루어져야한다는 이야기 이상이 생각나질 않는다. 하지만 인류가 불과 100여년전만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노예로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전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오만이 아닌가 생각된다. 분명 거대한 전환의 발동은 그다지 쉽지 않겠지만, 그 추구는 위기의 시대를 타개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 졸렬한 글을 적어보았다. 위기의 시대는 기술과 인간의 격차에서 비롯되고, 그 강력한 기술로 인해서 인류는 공멸이라는 위기에 처해있으면서, 현재까지의 해결체계로는 극복할 수 없는 위기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문제에 의해서 성숙이 일어나지 않고 대중이 군중으로 후퇴하면서 오히려 무기력해지고, 탈가치를 무가치로 오해하면서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 생존의 위기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는 가치에 대한 위기의 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해결은 인간이라는 가치에 대한 추구를 통해서 극복되는 것이 가장 원천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구조적인 무기력에 대해서도 당장은 인간이라는 가치에 대해 걸어볼 수밖에 없다. 총체적인 진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슬프지만 당장은 거대한 전환이 일어날 거라는 희망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수천년 살아왔다. 다만 이번의 위기가 좀더 잠재적이고 치밀하고 위험한 암처럼 전이되었을 뿐이다. 위기를 겪더라도 인간에 거는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위기의 시대를 지나 인간의 시대가 오길 기대하면서 글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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